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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극복 10년 : 우리사회 이렇게 달라졌다

한알두알 2007. 11. 28. 16:56
IMF 외환위기 극복 10년

 







출판기획전문 프리랜서 임현주(38) 씨는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여행과 취미생활을 즐긴다. 경력이 쌓일수록 우대받고 나이 제한 없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어 프리랜서를 택했다. 여행 다니기 편하게 차는 마련했지만 집 마련에 애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북한산 기슭의 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몇 달 일하고 인도나 태국 등에 몇 달씩 장기여행을 다닌다. 건강을 위해 꾸준히 수영을 하고 밸리댄스 등 즐길거리도 여러 가지를 배운다. 주변에서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억지로’ 결혼할 생각은 없고 아이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특별한 신조는 없지만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임씨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결혼을 통해 가족을 형성하고 자녀를 육성하며 노후를 자녀에게 의존하던 전통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필요한 만큼만 벌고 여행과 취미생활을 즐기며 사는 ‘웰빙’의 생활방식도 묻어난다.  

그동안 남녀 간의 양성평등과 가족관계 등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UN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권한척도는 2002년 64개국 중 61위로 최하위권 이었으나 2005년에는 80개국 중 59위, 2006년에는 75개국 중 53위로 개선됐다. 여성권한척도는 여성의원 비율, 여성 관리·전문직, 남녀소득비 등에 의해 산출한다. 최근 직장에서 여성 상사를 모시는 일이 흔해졌다는 경험담도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는 사례다.

통계청의 사회 통계에 따르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응답이 1998년에서 2006년 사이에 33.6%에서 25.7%로 감소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결혼한 여성들 중 아들이 ‘꼭 있어야함’이라고 대답한 비율이 1997년 24.8%에서 2000년 16.2%, 2003년 14.1%, 2006년에는 10.2%로 지속적이며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였다.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1997년 52.9%에서 외환위기를 맞아 1998년 50.3%까지 떨어진 후 계속 상승해 2006년에는 54.8%로 올랐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왕성해지는 긍정적인 변화의 이면에는 저출산이라는 암초가 자리잡았다. 양성평등과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이 개선되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부담을 주는 아동보육과 교육에 대한 지원이 절실해진 것이다.

정부의 육아지원 예산은 1997년 1337억 원에서 2006년 1조574억 원으로 10배 이상 크게 늘었다. 특히 참여정부에서는 차등보육료 지원대상을 도시근로자 월평균소득 100%(369만 원)까지 확대하고 장애아 무상보육료 지원제도를 도입하여 여성들의 육아부담이 크게 줄었다. 이에 따라 2005년 1.08명까지 하락했던 합계출산율이 2006년 1.13명으로 늘어났고 올해는 1.20명에 이를 전망이다.

 








10여 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2003년 ‘자의반 타의반’ 사직한 김모(42) 씨는 재취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적정한 대우와 안정성을 보장할 일자리를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취업과 실직을 두 차례 경험한 끝에 지난해 간신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했다.

보수는 예전 직장보다 훨씬 적지만 전문경력을 쌓아 보다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이다. 김씨는 “전에는 그냥 직장일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재취업하면서 현실을 실감했다”며 “특히 경력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경쟁위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고용불안과 실업의 문제를 불러왔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면 정년퇴직)이라는 자조적인 유행어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국민의식조사-IMF 10년, 한국 사회 어떻게 변했나’에 따르면 직업·직장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으로 직업 안정성(55.7%)이 1위를 차지했다. 2위를 차지한 보수(14%)와 3위 ‘적성과 흥미’(3위·12.5%)를 압도하는 수치였다.

또 10년 전에는 급격한 경기 변동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나 현재는 취업난·실직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고 10년 뒤 불안 요소로는 환경오염, 기상이변, 노후대책 미비 순으로 나타나 신종 재난과 고령화에 대한 걱정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63.2%가 복지제도가 확대돼야 한다고 응답한 것도 당연했다.

이 같은 고용불안과 양극화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은 꾸준히 증가했다. 사회보장예산을 보면 2002년 10조6768억 원, 2004년 12조8298억 원, 2006년 15조1560억 원 등으로 점차 늘면서 서비스 범위가 넓어졌다.

1998년 14.4% 불과하던 고용보험적용 사업체 비중이 35.8%까지 높아졌고 실업자 3명 중 1명이 실업급여를 받고 있다. 고용안정센터의 구인·구직활동을 통해 취업한 건수가 참여정부 출범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06년 현재 약 40만 명이 취업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 취업률도 24.8%까지 증가했다.

기초생활수급자 범위를 150만 명 이상으로 확대해 복지 지원을 강화하면서 사회안전망이 훨씬 촘촘해졌다.
일자리 창출은 참여정부가 중점을 두는 사업이다. 서비스산업 육성과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 등을 통해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연평균 33만7000개, 올해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등 고용여건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

 








전통과 권위주의가 물러나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확립되면서 ‘성역’이 사라졌다.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군 등 누구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부패방지법 제정과 공직자윤리강령 선포, 선거법 개정 등을 통해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의 큰 진전을 이뤘다. 불법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정경유착과 부패정치를 청산한 것은 참여정부 개혁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권력이 낮아지고, 검찰, 경찰, 국정원 등 정권에 봉사하던 권력기관도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일관된 과거사 정리 작업으로 ‘잘못된 권력행사는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원칙이 새롭게 정립됐다. ‘관치 경제’가 사라지고 시장 자율과 공정한 경쟁이 자리잡았다. 신용카드와 현금영수증의 도입 등으로 상거래 관행도 투명해지는 등 모든 부문에서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하고 있다.

 








길거리에 외국인이 많아졌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아지고 외국인 노동자에 외국인 결혼이민자도 늘고 있다. 여행, 유학, 취업, 이민 등의 이유로 우리 국민의 해외나들이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해외여행만 해도 1997년 45만2000명에서 2006년 1161만 명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외국인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고 외국인 결혼이민자들을 돕기 위한 시민단체도 활동하는 등 다문화시대에 걸맞은 의식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류’라는 말을 통해 우리 문화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진 것도 10년 동안의 변화에 포함된다. ‘대장금’ ‘겨울연가’ 등 드라마의 해외수출이 늘어 방송프로그램 수출입 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할리우드 영화가 독점하다시피하던 영화부문에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대작들이 출현하면서 국내영화의객석 점유율이 50%를 넘어선 것도 축적된 문화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IMF 10년의 사회변화를 분석하는 보고서를 펴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김승권 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사회양극화 같은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 측면 등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을 실감했다”면서 “정부의 복지투자 확대정책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으리으리한 아파트’에 살면서 ‘공주님’ 소리를 듣던 외동딸의 삶은 아버지가 뺑소니차에 치어 지체장애인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가 덮치자 세 식구는 부엌도 화장실도 없이 칼잠을 자야 하는 산동네 쪽방촌까지 밀려났다.

친구들에게 ‘쪽방촌 거지’라는 놀림을 들으며 가난이 ‘외롭고 슬픈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 소녀는 유명브랜드에 민감한 사춘기를 건강하게 견뎌내고 ‘남을 도우며 살겠다’며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이 됐다.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외로운 아이들과 노인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 정부 주거복지지원사업의 도움으로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전셋집을 얻어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됐다.

어린 시절 시인을 꿈꿨던 이야기의 주인공 장시아(22) 씨는 자신의 삶과 봉사활동 체험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을 발표, ‘사회복지문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며 화제가 됐다. 지난해 나온 시집 ‘그늘이 더 따뜻하다’와 올해 6월에 펴낸 산문집 ‘까치집 사람들’이다.

시와 산문을 함께 엮은 ‘까치집 사람들’에는 쪽방촌과 소외된 이웃들의 삶,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노숙자, 독거노인, 장애인, 보육원 아이들에 대한 느낌이 손에 묻어날 듯 생생한 말로 표현돼 있다.

누더기처럼 낡고 좁고 쪽방에
병든 아버지의 신음소리와
고통이 절어있는 이불 한 장과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작업복이
피곤을 구겨든 채 방바닥에 뒹군다.

아버지는 연신 신음을 뱉어내고
어머니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어머니의 눈물이 따듯하다
너무나 따듯해서 내가 따라 흐느낀다
나도 따듯해진다 
 (‘까치집’에서)

쪽방촌의 삶은 힘들었다. 찌는 여름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석유곤로로 밥을 지으면 땀으로 목욕을 해야 했고 몸이 아픈 아버지를 부축해서 쥐들이 우글대는 공동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끔찍했다. 그만큼 집이 갖는 의미를 실감하게 됐다. 먹고 입는 일은 어찌어찌 해결해도 최소한의 집이 없으면 사람답게 사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나 어머니가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 자신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아버지 약값을 대고 나면 집 마련의 꿈은 한낱 물거품이었다.    

그래도 소녀는 씩씩했고 쪽방촌 이웃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앞 못 보는 아버지를 모시는 열두 살 소녀가장을 보며 안타깝지만 ‘예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숙이는 지난 해 5학년을 끝으로
일당 삼천 원의 구슬꿰기 일을 해요
그 돈을 모아서 양식사고 반찬사고
어쩌다 아버지의 소주 한 병 사들 때면
신명나서 신명나게 깨금발로 뛰어가요. 
 (‘햇빛 좀 나눠주세요’에서)

주거복지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5000만 원 범위 내에서 이사 가고 싶은 집을 직접 정하라는 통보에 세 식구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한 채 벙벙한 상태로 그날 밤을 꼬박 지새웠다.

“한번 가난의 늪에 빠지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나라에 태어나 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전세자금을 융자해 줄 생각을 하다니…. 누군가를 따듯이 감싸주고 밝은 햇빛이 되어주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고 정말 꿈같은 일이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어요.”

꿈에 그리던 혼자만의 방에 앉아 장씨는 ‘내가 이토록 행복해하는 시간에도 어느 쪽방 아니면 차디찬 시멘트바닥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과 외로운 아이들을 위해, 미안함을 덜기 위해’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성탄절 새벽 무심코 지나쳤는데 노숙하던 노인이 동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참담했어요. 넓고 큰 집에 대한 욕심, 집으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집값 땅값이 치솟아 가난한 사람들이 쪽방촌에서 살아야 하고 길거리에서 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게 사회의 편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부모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바르게 자랄 수 없고 행여 자기 자녀들이 그런 아이들과 어울릴까봐 경계하는 시선이, 온정을 베푼다고 찾아와서 사진 찍기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외롭게 한다. 그래서 지원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 더 시급하다. 양극화도 단순히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데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택대 사회복지학과 졸업을 앞둔 장씨는 꿈이 크다. 모든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돕고 싶으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형편이 어려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젠 제가 실천할 때지요. 사회복지사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할거예요. 많이 배워 기업의 복지사업 같은 일도 하고… 다 바꾸고 싶은데, 돈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고…. 이런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글도 계속 쓰고 싶어요.”           

글 김병훈 기자 사진 한준규 기자